19세기 근대미술(출처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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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준한 | 등록일 | 19.06.04 | 조회수 | 287 |
근대미술(近代美術)은 프랑스 혁명 시기를 전후로 등장한 미술을 일컫는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포함한다. 보통 인상주의 이후를 현대미술로 규정한다. 개요[편집]종종 근대미술은 현대미술과 혼용되어 사용된다. 이는 Modern의 번역어로 근대와 현대가 혼용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보통 근대는 현대보다 과거를 지칭하고, 미술계에서 현대미술의 시작을 인상주의부터 보는 경우가 많으므로, 보통 근대미술이라고 하면 르네상스 미술, 바로크 미술과 현대미술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현대미술 중에서도 1970년대 이후의 미술은 동시대미술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순서대로 근대미술, 현대미술, 동시대미술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이 시기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한 구체제가 붕괴되었으며, 산업 혁명이 일어나 산업 구조와 사회 구조가 변하고 제국주의가 횡행하였다. 기술과 사회 구조는 변화하였지만, 아직 근대 이전의 사고관념을 반영한 것이 근대미술의 특징이다. 연구자에 따라 사실주의도 근대미술에 넣는 경우도 있다. 주요 사조[편집]신고전주의(neo-classicism)는 18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발전한 미술 사조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문화의 고전적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은 장식, 시각예술, 문학, 연극, 음악, 건축을 이른다. 18세기 계몽주의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 19세기 초까지 이어졌으며, 후에 낭만주의와 대립한다. 건축에서는 19세기,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양식이 이어져 오고 있다. 역사적 배경[편집]
전파[편집]
특징[편집]
발전양상[편집]
낭만주의(浪漫主義, 영어: romanticism, 문화어: 랑만주의)는 서유럽에서 발생한 미술적, 문학적, 지적 사조(思潮)이다.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800년~1850년 사이에 정점을 찍었다. 또한 굉장히 행복한 사회생활을 만들면서 사람들의 혁신적인 자세를 개척해나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이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했고 또한 이러한 비참한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낭만주의가 생겨났다. 개요[편집]18 ~ 19세기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에 반대하여 나타난 낭만주의는 로맨티시즘(Romanticism)이라는 단어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비현실적이다. 탄생과 성장, 쇠퇴와 소멸을 겪는 것은 사회의 한 특징이라 말하였으며, 이것은 후에 《문명 형태학》(아놀드 토인비)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슐라이에마허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자신의 신학방법으로 감정(Gefühl, feeling)을 기독교 종교의 본질로 보았다. 배경[편집]19세기 중엽에 성립된 로맨티시즘은 산업 혁명으로 인한 사회 변화를 따르기 보다는 과거의 중세 봉건사회나 이국적인 것에서 이상을 찾고자 했다. 그 주요한 동기는 사회의 분열과 이기주의의 만연을 부정하고, 중세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던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원망(願望)이다. 때로는 중세에서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완성이 가능했었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한다. 후자는 개인을 절대화하는 것에 의해 현실적으로는 니힐리즘으로 발전해 간다. 이에 대해 전자로부터는 사회를 개인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그것은 사회유기체론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상은 사회를 절대화하려는 내셔널리즘으로 그 맥락이 이어지게 된다.[1] 미술[편집]낭만주의는 문학에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 무렵부터 중세의 이야기나 이국정서 등에 비상한 흥미를 모으고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위압적인 경향에서 놓여나 인간의 자연적 욕구인 자유·정열로 내닫는 것이지만, 미술의 경우는 단지 제재를 문학이나 정서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신적인 사상을 뿌리쳐 감정을 자유롭게 토론하고, 그 내용이나 색채에 훨씬 정열을 의식케 하는 표현을 찾아 나아가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방을 존중하고 있었으나, 낭만주의는 하나의 전형(典型)을 갖기보다도 개인을 해방하여 개개인의 감수성에서 새로운 창조를 추구하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무궤도(無軌道)를 극도로 금지했으나, 낭만주의는 이성에 치우친 냉정함이 본래의 감동이나 정열을 없앨까 싶어 염려하고 있다. 이미 그것은 제1보로서, 프뤼동의 우아하고 고상한 작품도 로맨틱한 꿈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러나 확연한 기운을 보인 것은 그로의 정열적인 제작이었다. 그로는 루벤스의 정열적인 색채에 심취하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스승 다비드의 엄중한 교의(敎義)를 존중하면서도 그 분방한 천성은 유감없이 작품에 나타나서, 특히 전쟁화에는 초연(哨煙)의 냄새와 더불어 사람을 뒤흔들 것 같은 감동이 움직이고 있다. 그로는 그 색채에서도 약동이야말로 작품의 생명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로에 이어서 제리코가 나오고, 다시 들라크루아가 나타나서 낭만주의는 크나큰 비약을 하게 되었다.[2]
상징주의(象徵主義)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예술 사조이다. 자연주의나 고답파(高踏派)에 대해서, 주관을 강조하고 정조(情調)를 상징화하여 표현하는 것을 주안(主眼)으로 했다. 《악의 꽃》의 보들레르를 비롯하여, 베를렌, 랭보 등이 대표적인 시인이며, 마테를링크, 릴케, 예이츠, 와일드 등 20세기의 주요한 문학자는 여기에서 탄생되었다. 미술[편집]미술에서 상징주의는 상징주의 시인의 영향 아래 조금 늦게 나타난 반사실주의적인 경향을 지향했으나, 문예의 경우처럼 명확한 주장이나 운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직접적으로는 비평가 오리에(Georges Albert Aurier, 1865∼1892)의 논평 <회화에 있어서의 상징주의>(1891)에서 고갱을 중심으로 한 퐁 타방 파(이 파는 오리에의 논평에 의해 종합주의라고도 불리었다)와 고갱이 타히티로 떠난 뒤 오리에의 주장에 가까운 나비파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후의 논평에서는 고갱 등의 음악적·장식적인 구성을 목표로 한 작품보다도 도리어 신비적인 주제를 취급하는 작품을 포함한다. 퓌비스 드샤반느, 르동, 귀스타브 모로, 카리에르, 앙소르, 클림트 등이 대표자로 간주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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