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미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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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준한 | 등록일 | 19.01.03 | 조회수 | 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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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392년에 고려의 뒤를 이어 건국된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불교 문화가 퇴조하고 겸손과 소박함을 미덕으로 하는 유교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적인 미술보다는 회화나 실용적인 목공예, 도자기공예가 발달하여 서민적이고 소박한 미술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전기의 회화는 고려의 화풍과 중국 북종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남종화풍이 들어와 남종화 계통의 그림과 사대부 들이 여가를 이용해 그리는 문인화가 유행했다. 특히 후기에는 정선에 의해 독자적인 한국적 화풍인 진경 산수화가 그려졌고, 시대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가 유행하는등 회화에 있어 유례 없는 발전을 이룩하였다. 전기: 안견, 강희안, 안평 대군등이 활약했던 시기로, 특히 안견파 화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안견은 꿈의 세계를 웅장하게 그린 〈몽유도원도〉와〈적벽도> 등의 그림을 남겼고, 강희안은 <고사 관수도>를 그렸다. <송하보월도>를 그린 이상좌는 천민 출신으로 산수화, 인물화에 능하였으며, 신사임당은 〈초충도> <포도도><화조도> 등을 그린 여류화가이다. 중기: 안견파 화풍이 계속되며, 절파계 화풍이 대두된 시기이다. 또 남종 문인화가 소개되어 소극적으로 나마 수용되었다.<동자견려도><한림제설도>등을 그린 김제, 대담하고 힘찬 필치로〈산수화〉<달마도>등을 그린 김명국, 영모, 화조화에 뛰어난 이암, 이정, 어몽룡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 이다. 후기:조선 후기에는 남종화법에 기반을 두고 우리 나라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대두 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생활상을 해학적으로 그린 풍속화가 유행했다.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정선〈금강전도〉<인왕제색도> 등을 남겼고, 심사정은 남종화풍의 영향을 받은〈강산박야도>를 그렸다. 한편, 서민 문화와 함께 발달한 풍속화는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에 의해 대표된다. 말기:조선 시대 말기는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가 크게 성행하여 토착화된 시기이다. 또한 서구 화풍과 남종 화풍이 섞인 이색 화풍이 형성되었다. 김정희는 남종 문인화를 크게 반영한〈세한도〉<부작란>등을 그렸고, 허유는 남종화풍을 한국화단에 토착화시킨 화가이다. 이외에도 장승업, 조석진, 조희룡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조선의 백자-실용성을 중시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
분청사기도장무늬대접 백자철채포도문항아리 청화백자진사채복숭아연적 베갯모와 자개함 경회루 경복궁에 있는 누각. 근정전 서편에 있다. 만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으로 나온 건물이기도 하다. 경회루는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마다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 공포에 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로 팔작지붕에 2층으로,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칸로 총 35칸이다.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섬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현존하는 가장 부피가 큰 전통 건물이기도 하다. 숭례문 600년 동안 한양을 둘러싸고 있었던 한양도성의 남쪽에 위치한 문. 대한민국 국보 1호. 현재도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건축물이다.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 4월 20일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의 꿈을 꾸었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3일만에 그림이 완성되었으며, 매죽헌에서 몽유도원도라는 제서(題書)를 달았다. 이 그림의 화풍은 꿈속 도원을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俯瞰法)으로, 기암절벽 위에 복사꽃이 만발하고, 띠풀로 엮은 초막과 폭포수 아래 빈 배도 보이는 꿈속의 낙원을 표현한 안견(安堅)의 걸작이다. 고사관수도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예술인으로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絕)이라 일컬어졌던 강희안이 말년이던 15세기 중엽, 1460년대에 그린 그림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 양팔을 모아 턱을 괸 채 수면을 바라보는 한 노인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에서 '고사관수'의 명칭은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본다"라는 뜻이다. 김홍도의 작품들
김홍도 -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1771년에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부터 경력을 쌓아나갔다. 이후 1781년, 어진화사(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임명되어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89년에는 스승인 김응환과 함께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라는 밀명을 받고 떠났는데 김응환이 병으로 죽자 혼자 쓰시마 섬으로 건너가 일본 지도를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지도는 국가 기밀이었기에, 그 정도 임무를 맡을 정도로 정조가 믿고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후기 풍속화에 있어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신윤복(약 1758-1813 이후)이 여인의 전신상(全身像)을 그린 작품으로, 화면 속 여인은 머리에 가체를 얹고 회장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다.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로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묘사하였고 은은하고 격조 있는 색감으로 처리하였다. 자주색 회장 머리 띠, 주홍색 허리끈, 분홍색 노리개 등 부분적으로 가해진 채색은 정적인 여인의 자세와 대비되어 화면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마치 초상화처럼 여인의 전신상을 그린 미인도는 신윤복 이전에는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19세기의 미인도 제작에 있어 전형(典型)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크다. 이러한 사유로 ‘신윤복의 미인도’는 필치나 화풍에서 신윤복의 회화를 대표할만한 작품이다.
‘하마선인도’는 유해의 중국 고사를 작품화한 것이다. 유해는 중국 오대의 후량(後粱) 사람으로, 출세가 보장된 재상 자리를 내려놓고 속세로 하산하여 도의 경지에 든 선인이다. 유해의 호는 ‘해섬자(海蟾子)’로, 그 곁에는 두꺼비가 수호신처럼 함께한다. 세 발 달린 두꺼비는 유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영물이다. 두꺼비는 한자로 ‘섬(蟾)’ 혹은 ‘하마(蝦)’라고 하는데, 유해와 두꺼비를 묶어서 ‘유해희섬(劉海戱蟾)’ 또는 ‘하마선인(蝦仙人)’이라고 한다.
국보 제217호.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고, 화폭의 크기는 세로 130.7㎝, 가로 59㎝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금강전도(金剛全圖)」는 정선이 만 58세 때인 1734년(영조 10) 겨울 만폭동(萬瀑洞)을 중심으로 금강내산(金剛內山)의 전체 경관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왼쪽 윗부분에 ‘금강전도(金剛全圖)’라는 제목과 ‘겸재(謙齋)’라는 그의 호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겸재’라고 새긴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정선은 산수화가 중국화의 모작에 그쳤던 시기에 스스로 국내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일일이 사생하여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많이 그림으로써 한국 산수화의 기원을 세운 선구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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